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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이천사2 2008. 12. 14. 21:46

종    목 : 사적  제124호 
명    칭 : 덕수궁(德壽宮)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63,190㎡ 
지 정 일 : 1963.01.18 
소 재 지 : 서울 중구  정동 5-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덕수궁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은 원래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였다가 1년 반 만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병란에 소실된 까닭에 머물 궁이 없었기에 왜군들이 주둔하여 파괴를   면한 당시 황화방(皇華坊:정릉동 일대)의 종친과 양반가 등의 민가들을 수용하여 임시 궁궐로 개조, 정릉동 행궁으로 삼고 시어소로 머물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생전에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결국 이곳 행궁에서 승하하신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에 창덕궁 복구 공사가 마무리되자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하였고, 광해군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이어(移御)하였다.

한편 1623년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경운궁 별당(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 석어당과 왕비의 궁방인 명례궁 건물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떠나게 된 후로 경운궁은 어려운 시절의 쓰라림을 회상하는 뜻 깊은 공간인 궁으로 남게 되었다.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친일적인 관료들과 일본의 압력이 가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건양 2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지면서 경운궁은 고종에 의해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런데,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이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밀사를 파견한 사건을 트집잡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 시킨다. 1907년 8월 경운궁 돈덕전에서 황제즉위식을 가진 순종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함으로써 경운궁은 마침내 궁궐로서의 임무를 다하게 되었다.

한편,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가 붙여지게 되면서 오늘날의 덕수궁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데, 덕수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조선 초 정종에게 양위(讓位)하고 물러난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 이기도 했다. 이처럼 덕수궁이란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인 것이다.


1919년 고종이 침전인 함녕전에서 승하하면서 주인 없는 궁궐 덕수궁은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고, 전각들이 파괴, 왜곡되었다. 1922년 일제는 선원전의 터를 통과하는 도로를 뚫었는데 이 길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며, 이때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엄비의 혼전은 헐려 경기여고가, 또 도로의 동편에 있던 제사준비소 터에는 지금의 덕수초등학교가, 1927년에는 경성방송국이 건립되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궁내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게 되어 훼철된 덕수궁은 1933년 10월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현재 남아 있는 경운궁의 영역은 대한제국 당시의 1/3정도일 뿐이다.

 

대한문(大漢門).

 

대한문은 원래의 경운궁의 정문이 아니었으며 본래 이름 또한 대안 문(大安門)이었다. 정문인 인화문이 있었으나 주위에 민가가 교통이 불편한 반면, 동쪽에 있는 대안문은 1900년대 고종의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의 일환으로 방사상 도로가 나 자연스레 자주 이용되면서 사실상의 정문이 되었다. 1904년 경운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대부분의 건물이 중건되는데 이때 대안문도 수리를 했다. 1914년 태평로가 뚫리면서,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두 번 뒤로 밀려났다.

 

현판 대한문(大漢門)은 1906년 한성판윤(현 서울시장) 남정철(南廷哲)글씨.

 

마침 수문장교대식 행사가있어 좋을볼거리를 제공한다.

교대식 행사의 정통악기를 연주하는 행렬.

 

당시 궁을 지키고있는 모습이다.

 

대한문안쪽과 금천교.

 

 

금천교를 지나면 중화문가는길이다. 대한문은 동문이기에 길 오른쪽으로 중화문이있다.

 

중화문(中和門)

법전인 중화전의 정문에 해당되는 문이다. 중화문은 현재 단독 건물 처럼 남아 있으나 원래는 다른 궁궐에서와 같이 좌우로 연결된 회랑이 동서쪽으로는 물론 거기서 다시 남에서 북으로 연결되게 둘러져 있어 중화전 마당 조정(朝廷)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다 철거되고 이 문 동쪽에 그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이 중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城門) 등이 있었다.

 

중화문에서 중화전을 바라보면 바닥은 박석이 깔려 있고, 벼슬 아치의 높낮이 순으로 관계(官階)의 품(品)을 새겨 세워둔 품계석이 있다. 맨 앞줄에 있는 정일품이 최고의 품계이다. 중화문을 거쳐 삼도를 따라 들어서면 하월대의 석계에 이르고 이 석계를 오르면 다시 상월대 석계에 다다른다. 넓은 이중 월대 위에 우뚝 솟은 전각이 바로 중화전이다.

 

중화전(中和殿)

중화전은 경운궁의 정전(正殿)으로 보물 제 8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왕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조례를 행하며 공식적인 행사를 집행하였던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로, 1902년 건립되었으며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06년 중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중층 건물이었으나 다시 지을 때는 단층으로 중건되어 현재도 단층 지붕으로 남아있다.

 

하월대와 상월대의 봉황과 해태상.

 

중화전에서 바라본 중화문과 삼도, 품계석 

조선의 궁은 바닥에 화강암을 깔았는데 미끄러움을 방지하고 빛의반사에따른 눈부심을 방지하고자, 바닥을 울퉁불퉁하게 하였다한다.

 

중화전 안에 있는 어좌는 부처의 자리와 같이 꾸며 높게 마련한 용상위에 놓는데, 머리 위에는 보개를 두고 포작으로 닫집을 짰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을 쳐서 임금의 권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중화전 뒤로는 준명당과 즉조당이 있다.

 

준명당(俊明堂)

중화전이 공식행사를 하던 곳이라면 준명당은 고종이 실질적인 업 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편전(便殿)이었다. 이곳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광무 원년(1897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이곳을 준명전이라 불렀다가 언제부터인가 준명당으로 바뀌었다.

전각이름에 붙게 되는 전(殿)은 당(堂)보다 격이 한 단계 높은 것으로서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물인 왕비 혹은 대비 등과 관련된 건물에만 붙게 된다. 고종 나이 예순에 양귀인 과의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1916년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즉조당과는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월랑이다.

 

즉조당(卽阻堂)

즉조당의 의미는 왕이 즉위를 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여기에서 조선조 제15대 광해군과 제16대 인조가 즉위하셨다. 현재의 중화전이 지어지기 전에 이곳이 임시 정전(正殿)으로 사용되면서 광무 원년(1897년)엔 태극전 이라 하였다가 이듬해에 중화전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1902년 지금의 중화전이 지어지면서 다시 원래의 이름인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고종의 후비인 엄비가 돌아 가실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즉조당 현판을 보게 되면 어필(御 筆)이라는 한자와 광무구년을사칠월(光武九年乙巳七月)이라는 한자가 쓰여있다.

어필은 왕이 쓰셨다는 뜻이므로 고종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광무는 대한제국의 연호이니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불에 타 버려 1905년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월랑으로 이어진 즉조당과 준명당

 

 

즉조당 옆에는 석어당(昔御堂)이다.

석어당은 임진왜란 후 선조 임금이 거처하셨던 건물로써 한자를 풀이하더라도 옛날 임금님이 머물렀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조 임금이 이곳에서 16년간이나 머무시다가 1608년 승하하신 곳이다. 그 후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머물기도 하셨다.

석어당은 경운궁 내에서 유일한 2층 건물이며,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눈에 띤다.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조임금이 임진왜란 이후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셨기 때문에 그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칠해지지 않았다고도 하고, 또 유교 사회의 검약을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04년 화재 이후 중건된 것이며, 아래층은 정면 8 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인 팔작 지붕의 건물이다. 

 

 

 

석어당 내부.

 

 

석어당 옆으론 아담한 담장사이로 정관헌과 덕홍전 함년전이있다.

정관헌 문이다.

 

덕홍전과 함녕전으로 들어가는문.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다.

정관헌은 덕홍전 함녕전의 휴식공간이기 때문이다.

 

정관헌(靜觀軒)

중국풍이 느껴지기도 하는 서양식 건물로 설계는 러시아인이 공사는 중국인이 했다. 여기서 고종은 연회를 열기도 하고 가배다(嘉排茶,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뒤편 동산에 위치하여 내전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딘가 모르게 우리나라 건물이 아닌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난간과 지붕 아래쪽을 장식한 문양(박쥐, 소나무, 사슴등)이나 기둥(천원지방)을 보면 기본적인 개념은 우리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보면 아직도 문을 냈던 자국과 주방으로 연결되는 작은 창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한때 커피숍으로 이용되었던 정관헌의 모습도 그릴 수 있다.

 

 

 

정관헌 앞쪽에는 덕홍전과 함녕전이다.

덕홍전(德弘殿)

고종황제가 외국사신이나 고위 관료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외국세력을 통해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싶다.
덕홍전은 전기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참고로 우리 나라 최초의 전등은 1887년 경복궁 내 건청궁에 설치된 바 있었다. 일상생활을 하는 곳은 아니므로 바닥을 온돌이 아닌 마루로 되어 있고, 특이하게 정면3칸, 측면 4칸으로서 측면이 정면보다 더 크다는 특징을 지닌다.

안에는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꽃과 꽃 양 옆으로 봉황의 머리가 있다. 여기서 오얏꽃을 1910년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후에, 한 국가의 문장으로서 자격이 아닌 일본 천황 밑의 일개 제후국 귀족가문의 문장을 뜻하는 망한 나라 왕실의 상징으로 격하, 왜곡되었다.

 

함녕전(咸寧殿)

덕홍전과 이웃하고 있는 이 전각은 침전의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지금의 전각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후 다시 중건한 것이다. 함녕전 앞에는 행랑이 둘러서고 있고 내시나 궁녀가 기거하면서 시중을 들었음을 보여준다. 훼손되기 이전에는 이러한 행랑이 밖에 하나 더 있었는데, 외행랑이라 불렀고 이쪽에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광명문이 있었다. 현재는 미술관 가는 쪽에 자격루, 흥천사종, 신기 전기화차 등을 넣어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현재 문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덕홍전과 함녕전

 

석조전(石造殿)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된 지상 3층 연건평 1,247평 의 석조 건물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고문 이었던 영국인 브라운의 발의에 의하여 영국인 기사 하아딩에게 의뢰하여 설계되었다.
 
1904년 11월 브라운은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와 교체되며 자연스레 건축 주도권도 넘어가서 결국 그에 의해 완공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2층에 접견실, 3층에 황제의 침실, 1층(반지하)에 시종들의 대기장소를 두었다.

건축양식은 희랍 로마양식의 복고로 구미(歐美)에 유행하였던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의 일종으로  신고전주의를 따른 것이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946년 1월 16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로 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그 첫 예비회담이 열렸다.

 

석조전은 준명당 바로옆에있어서, 중세와 근대의 좋은 비교가 된다.

 

한국적곡선과 유럽적직선의 좋은 대비다. 

 

육중한 모습을 보여주는 석조전.

 

 

 

 

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있는 서관이다.

 

석조전 뒤로는 아담한 정원이다.

 

 

석조전 뒤의 포덕문(布德門)을 나서면, 그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이다. 

 

 

광명문(光明門).

함년전의 정문이었으나,1938년에 이곳으로 옮겨져 흥천사범종과 창경궁 보루각의 물시계인 자격루의 전시처가 되었다.

 

흥천사(興天寺)-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1396년(태조 5) 왕실발원으로 170여 칸에 이르는 대가람을 이룩한 뒤 극락보전에 궁중원불인 명국보타락가산(明國寶陀洛伽山) 42수 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수도와 보국안민을 기도하는 향화(香華)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399년(정종 1) 신덕왕후강씨(神德王后姜氏)의 원당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화재로 소실되자 1569년(선조 2) 왕명으로 절을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옮겨 지었다. 1794년(정조 18) 성민(聖敏)·경산(慶山)·경신(敬信)의 발원으로 현 위치로 이건한 뒤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로 바꾸었다. 1846년(헌종 12)에는 칠성각을, 1849년에는 적조암을, 1853년(철종 4)에는 극락보전을, 1855년에는 명부전을, 1865년(고종 2)에는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절 이름을 원래대로 고쳤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명부전·용화전·칠성각·독성각·만세루·범종각·승방 등이 있다.

흥천사범종은 조선의 대표적 종 이다.

 

보루각 자격루 (報漏閣 自擊漏)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는 당시 사람들의 가장 오래된 바람이었다. 세종은 자동시보 물시계를 제작하기 위해 동래현의 관노였던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하여 중국에 파견해서 연구하게 하고, 상의원(尙衣院) 별좌의 관직을 주었다. 이에 장영실은 천문학자 김조(金)와 함께 2년 여의 노력 끝에 1434년(세종 16) 6월에 자격루를 완성했다. 이 시계는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그해 7월 1일을 기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해서 경루 대신 새로운 표준시계로 등장했다. 자격루는 당시 야루법(夜漏法)인 부정시제(不定時制:계절에 따라 시간의 길이가 다름)에 맞게 경점(更點)을 자동적으로 알려주도록 정밀하게 설계되었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조선 초기의 로켓 병기인 중·소신기전의 대량 발사장치인 신기전기를 설치한 화차.
현대의 다연장로켓과 같다. 화차는 1451년(문종 1) 문종에 의하여 처음 제작되었다. 문종 때 화차는 신기전기와 총통기 중 하나를 화차의 수레 위에 올려놓고 사용하였다.

《국조오례의서례》의 〈병기도설〉에 의하면, 신기전기의 구조는 길이 22.9㎝(7촌5분), 너비와 두께가 각각 5.5㎝(1촌8분)인 사각나무기둥에 지름 4.6㎝(1촌5분)의 둥근 구멍이 뚫린 나무통 100개를 나무상자 속에 7층으로 쌓은 것이다. 제일 아래층에는 10개를, 둘째 층부터 일곱째 층까지는 각 층마다 15개씩 쌓았는데 이 나무통의 구멍 속에 중·소신기전 100개를 장전한 후에 발사하였다. 신기전기가 장착되는 화차 수레는 나무를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발사 때에는 신기전기가 실려 있는 화차 수레의 발사 각도를 조절한 뒤 각 줄의 신기전 약통에 부착된 점화선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이면 동시에 15개씩 위층에서 아래층까지 차례로 발사되거나 한꺼번에 100발이 발사되었다.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여러 전란에서 사용하여 많은 효과를 보았다. 현재 세계에서 제작설계도가 남아 있는 로켓병기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밖에 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러시아공관 북쪽 언덕에서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이어졌고 구 서울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로도 이어졌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화재 뒤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은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렸다. 대한문은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하여 덕수궁 담장이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문도 1970년에 안으로 옮겨졌다.

19세기 말부터 궁내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중 돈덕전·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였는데, 돈덕전은 철거되었고, 석조전은 정면 54m, 나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정전과 주변 한식 건물의 고유한 건축구성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 모습이 많이 파괴되었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덕수궁은 비록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덕수궁 안내문에서..

 

조선의 영욕을 함께한 덕수궁.

중세와 근대가 함께한 덕수궁.

3/2가 없어져버린 덕수궁이지만, 시대의흐름에따른 영광과 아픔을 느끼기에 충분한 공간같았다.

경희궁보다야 훨씬낫지 않은가...

창경궁, 경희궁에이어 조선 5대궁의 하나인 덕수궁 답사를 마친다.

 

정문의 야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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